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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NPC다 : 인공지능과 조우하는 여러 단면들
김상우(미술·게임 비평가)
이 글은 2025년 11월 20일 개최된 ‘Hybridization: 인공지능과 혼성적 예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0. 미안하다. 네가 알던 세상은 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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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어느 날 깨어나 보니, 사고를 당했고, 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돌연 깨어난 상황을. < 사이버 펑크 2077 >의 주인공 V가 그랬다. 원래라면, 강화신체를 바탕으로 악당이든 무엇이든 무쌍을 찍으며 휘젓고 다녔을 테지만, 모든 능력을 상실한 그/녀에게 ‘익숙한’ 세상은 사라졌다, 그것도 영원히. 현재 시대는 그런 상황을 매우 ‘매우 느리게’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나긴 진화와 문명의 시간에 비하면 무척 짧은 순간이지만, 현재의 세대는 무척 ‘느린’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마다 지역마다 혼란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겪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시다시피, 기술적 매체의 개입 정도는 지극히 불공평하다. 여전히 어느 곳은 디지털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또 어느 개인은 기원전 시대를 살아간다. 그것이 현실이다. 다음에 묘사할 사건들은 그런 순간의 면면이 낯설게 드러난 국면들일 것이다. 어떤 것은 현실의 사례며, 어떤 것은 예술의 사례며, 또 어떤 것은 과학의 사례다. 명심할 것은 불쾌한 골짜기가 화면 너머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 말단에서, 즉 지각의 차원에서 ‘불(不)’은 곧장 소멸하고, 익숙해진 ‘쾌’만이 남는다. 이제부터 어떤 것들일지 확인해 보자. 
1.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몇 년 전, 저녁 무렵 식사를 마치고 동네 골목을 산책하고 있었다. 멀리서 어느 할머니가 무엇인가 안고서 달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했기 때문에 선명하지 않았고, 목소리가 나직이 들렸기 때문에, 당연히 할머니가 손주나 손녀를 데리고 외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가까워졌고, 나직한 소리는 명확해졌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익숙한 자장가 소리였다.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지나치다가, 문득 궁금해져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옷을 입었기 때문에 순간 착각했지만, 아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강아지였던 것이다. 그때 느꼈던 섬뜩함은, 지금도 생생하며 결코 잊을 수 없다. 무엇인가 등골을 차갑게 훑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차마 자장가 노랫소리를 듣는 대상이 강아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반응은 시대착오일 수 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인구가 천만명 가까이 되는 세상이니까. 이미 상당수 사람에게 그것들은 가족이다. 피붙이와 동등한 것이기에, 사람과 함께 살고 사람처럼 대우받는 게 현실이다. 옷을 입힌다고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본인이 소유한 동물에 옷을 입히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단연코 소유주의 자유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안고 있는 것도, 옷을 입히고 있는 것도, 간혹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것도, 워낙 많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둑한 저녁 골몰길에서 할머니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대상은 자연스러웠다. 적어도 그때는 말이다. 물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강아지를 안고 달래고 자장가를 불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양은 질로 바뀌었다.”1) 익숙하지 않은 것uncany은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대량으로 쏟아지면 익숙해지며,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감각이 시대착오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남는다. 인간이 있을 곳에, 인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익숙하지 않던 것이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옷을 입은 개를 볼 때마다, 벌거벗은 채 사족보행을 하는 인간이 떠오른다면, 너무 극단적인 반응일까. 아마도. 동물의 인간화가 인간의 동물화를 수반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2. 사냥꾼, 멧돼지 퀘스트를 거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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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이하 < 와우 >)를 할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여러 게임정보를 게임커뮤니티사이트에서 얻곤 했으며, 대표적으로 < 와우 > 인벤이 있었다. 그곳에는 직업, 던전, 아이템 등 여러 정보를 모아놓은 게시판이 있었고, 그날도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전전하는 와중에, 우연히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사냥꾼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2) 이야기는 간단했다. 멧돼지 잡는 퀘스트를 못하겠다는 것. 그런데 이유가 희한했다. 자기가 멧돼지를 소환수로 부리고 있기 때문에, 차마 같은 종인 멧돼지를 잡는 퀘스트를 하기 꺼렸다는 이야기였다.3) 알다시피 MMOROG는 퀘스트가 매우 많고, 그중 야생동물을 포함해 몹을 잡는 퀘스트 대단히 많다. 내용이 사뭇 흥미로웠기 때문에 곧바로 여러 답글이 달렸고, 이내 인기 있는 글로 올라갔다. 게시판 유저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대다수 의견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서 지적대로, 이런 종류의 게임은 어쨌든 몹을 잡아서 아이템과 경험치를 얻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비록 소수이긴 했지만, 공감할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적어도 일부 사냥꾼은 게임 NPC를 ‘애착’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양상을 이해하려면, < 와우 >에서 사냥꾼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와우 >에서 소환수를 부리는 직업은 사냥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법사와 흑마법사도 특성에 따라 정령과 악마를 소환한다. 그러나 사냥꾼은 그들과 처지가 다르다. 전자는 원래부터 있는 것으로 게이머가 고를 수 없지만, 후자는 직접 야생몹을 골라서 길들일 수 있다. 이른바 ‘테이밍’이다. 그래서 사냥꾼은 희귀한 야생동물을 ‘펫’으로 길들이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몇 시간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을 대기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느 다른 직업처럼 게임만 하는 사냥꾼도 있지만, 광적으로 희귀 야생동물을 ‘수집’하는 사냥꾼도 꽤 있으며, 이들은 마치 곤충도감을 꾸미는 것처럼 펫도감을 꾸미며 즐거워한다. 적어도 소수의 그들에게 펫은 ‘프로그램 코드’ 이상의 존재다.
3. 블루감마에서 연봉만 괜찮게 준다면, 나쁘지 않잖아?


근미래의 어느 날, 침팬지 조련사 애나는 동물원 직장을 잃고서 방황하던 중,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인공지능 펫 개발사 블루감마사가 그녀에게 자사의 프로토타입 ‘디지언트’ 교육을 의뢰한 것. 애나는 전문 조련사인 동시에 열혈 게이머였기에, 적격이었다. 원했던 길은 아니지만 고민 끝에, 그녀는 새로운 제안을 수락한다.4) 테드 창의 < 소프트웨어의 객체 주기 >는 익숙한 MMORPG의 가상세계에서 벌어질 만한 상황을 묘사한다. 인공지능 펫의 지위와 생존, 그것을 둘러싼 감정과 관계, 환경과 제도 등, 조만간 들이닥칠 미래를 ‘추측’한다. 이 소설이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애나의 태도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사냥꾼의 미래라고 할까. 그녀는 자기가 돌보는 디지언트 잭스를 동물‘처럼’ 돌본다. 아마 그녀가 ‘처럼’이란 표현을 들었다면, 정중하게 정정을 요구했을지 모른다. “애나는 디지언트를 엄청난 천부적 재능을 가진 유인원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5) 그만큼 애나는 잭스를 전심전력으로 보살핀다. 그랬기 때문에 잭스가 거주하는 플랫폼이 망해서 잭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잭스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잭스를 사무용 비서처럼 훈련시켜보기도 하고, 새로운 플랫폼에 ‘이주’시킬 비용을 알아보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은 육아일기이자, 가상의 디지털 생태계를 조명하는 인류학 보고서이기도 한다.

<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의 세계는 게이머라면 한 번쯤 상상했을 내용이 많다. 그저 장식에 불과한 펫이 조금 똑똑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쓰다듬으면 반응하고, 말을 걸면 ‘사람처럼’ 대화하고, 게이머가 직접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할 일을 하면 정말 편할 텐데 등등. 실제로 그런 기능을 추가한 경우가 없지는 않다. 게임행위 일부를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펫의 형태로 판매하는 것이다. 게이머 대신 떨어진 템을 줍는 기능이 대표적이다.6) 물론, 반론의 여지도 있다. 기능을 추가하는 것과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반련견 역시 한때는 사냥개였고, 여전히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가. 따라서, 사냥꾼의 애착이, 게이머의 ‘지각’이 변화되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으며, 일부는 현실이기도 하다.7) 더욱이 게임세계의 주민은 펫만이 아니다. 펫은 사실 게임의 세계에서 소수이며, 대부분의 주민은 NPC(Non Player Character)다. 때로는 게이머를 돕는 조력자로, 때로는 게이머와 맞서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어쨌든 그것들은 말과 행동에 따라 반응한다는 것, 즉 사람처럼 상호작용한다. 게임이 다른 기술적 매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같은 초기형 인공지능을 생명체처럼 구현하고, 게이머와 펫과 NPC의 상호작용을 ‘훈련’시킨다는 점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다.
4. 미적인 것, 지각구조, 그리고 뇌


이 세 가지 사건에서 눈여겨볼 것은 ‘지각구조의 변화’다.8) 무엇보다 기술적 매체가 일으킨 변화들, 처음에는 기괴하고 낯설지만 결국에는 익숙해져 버리는 것들.9) 물론, 벤야민은 기존의 예술을 중심으로 기술적 영화를 ‘편입’하여, 미적인 것(aisthesis, 지각작용)을 분석하려고 했다. 예술적 구심력은 여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은 다르다. 예술이 전위에 서서 변화를 주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오히려 예술의 외부에서 기술적 매체가 단단한 중심을 형성하고, 예술을 넘어서 사회·정치·문화로 영향을 확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다음의 질문은 유효하다. 백여년 전 영화가 ‘정신분산’을 훈련시켰다면, 오늘날 게임을 포함해 가상현실 플랫폼은 무엇을 연습시키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는 위해서 엉뚱한 사건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그것은 자아와 몸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4층에서 떨어진 남자의 이야기다. 
5. 자기 몸을 찾고자 창밖으로 몸을 던진 남자


취리히의 바텐더 A는 발작치료를 받던 중, 항경련제 복용을 그만뒀다. 어느 날 출근도 안 한고 맥주를 퍼마셨다. 졸음이 쏟아졌지만 참으려고 이리저리 걷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A는 자신에게 화가 나 소리치고, 자신을 흔들고, 뛰어들기까지 했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는데, 이쪽에 있던 몸이 저쪽의 몸으로 이동했고, 이후에 A는 자기를 흔들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는 공포와 혼란에 사로잡혔다. 나는 누구였지? 서 있는 것이 나일까, 아니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나일까.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A는 다행히 살아남았고, 자살할 생각은 없었고 ‘몸과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해’ 뛰어내렸다고 밝혔다.10) 의학에서 도플갱어(유체이탈)는 ‘자기환영 현상 autoscopic phenomenon’으로 분류된다. 여기서 auto는 자신을, scopic은 본다의 뜻이므로, 자기가 자기를 보는 현상이라고 하면 정확할 것이다. “‘환각지’가 절단된 팔이나 다리를 갖고 있다고 계속 느끼는 현상이라면, 누군가가 옆에 있다고 느끼는 이것이 전신으로 확장된 유사현상이다.”11) 뇌의 어떤 기능이 손상돼 나타나는 착각이란 것. 흥미로운 사실은 이 환영(착각)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절차는 다음과 같다. 첫째 A는 가상현실 고글을 쓰고, 둘째 B는 1미터 정도 떨어져 노트북 웹캠으로 A를 촬영하고, 셋째 촬영된 영상을 A의 고글을 전송한다. 이 결과, A는 현재 위치가 아니라 1미터 정도 앞에서 걷고 있는 자신을 뒤에서 보게 된다. “나는 그 행위를 실제로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그 행위를 보는 곳에 있었어요.”12) 내 안에 ‘내’가 없고, 내 ‘밖’에 내가 있는 것이다.13) 눈과 몸의 기술적인 불일치, 자기환영의 기술적 현실화, 이 지점에서 게임이 등장한다. 최초는 아닐지 몰라도, 이러한 뇌의 착각을 캐릭터의 형성과 관계에 기초해 ‘연습’시키고 있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6. 게임, 지각의 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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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하면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세대에 따라 인일칭슈팅 FPS 게임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으며, 익숙하지 않다면 3인칭 게임을 할 때조차 운동감각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3인칭 게임은 대부분의 경우 화면 정중앙에 있으므로 쉬워 보이지만, 이 역시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상하좌우 운동을 통제하는 방식, 나침반 같은 지도체계를 해독하는 훈련 등, 익혀야 할 게 많다. 어린아이가 자기 몸을 통제하는 훈련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똑같지는 않으며, 오히려 비슷할수록 문제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로 < 레드 데드 리뎀션 2 >의 조작방식을 들 수 있다. 이 게임은 대중의 인기와 전문가의 평가를 모두 만족한 흔치 않은 작품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초반부가 지루하고, 무엇인가 ‘느렸던 것’이다. 이는 서사적인 측면도 한몫했지만, 상호작용 방식이 지분을 크게 차지했다. 예를 들어, 책상서랍을 열고 아이템을 파밍한다고 하자. 보통의 게임은 이 과정을 축약해 한순간에 끝난다. 하지만 < 레드 데드 리뎀션 2 >는 거의 현실처럼 손으로 서랍을 열고 안의 아이템을 집어서 놓는 과정을 거의 그대로 묘사한다. 당연히 기존의 방식에 익숙한 게이머로서는 지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0.1초만에 끝낼 일을 3초에 걸쳐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것도 한 번만 하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하는 내내 그 과정을 반복한다. < 레드 데드 리뎀션 2 >는 내용(미국서부시대)은 물론 형식(지각과정)까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에 손해(?)를 본 경우다.
7. 구토하는 대중


여기서 핵심은 게임이 지각체계를 축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왜곡’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럽다. 공격과 방어 같은 행동도, 시간과 공간 같은 구조도, 그대로 묘사하면, 어떤 게임이든 진행이 안 된다. 자기 키보다 큰 칼을 들고 직접 휘두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능한 장르가 있다면, 닌텐도 위의 건강게임 < 링 피트 어드벤처 > 정도일까. 따라서 문제는 게이머·행위자며, 그들이 경험하고 숙달하는 과정을 눈여겨봐야 한다.14) 사실, 지각의 혼란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나타났다. 저옛날 기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때의 속도는 겨우 시속 40킬로미터 정도였지만, 두통을 호소하며 구토하는 환자가 발생했다.15) 이후 기차는 그저 많이 생산됐고 그에 맞춰 대중Mass은 그저 많이 탔다. 그들은 연습하며 익숙해졌던 것이다.
8. 놀이시간은 끝났어, 잭스. 이제 숙제해야지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문학예술을 설명했던 주체의 동일시identification 모형이다. 독자·관객과 캐릭터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서사적 동일시로 설명된다. 육체를 제거하고 정신적 자아가 캐릭터에 ‘일치’시킨다는 것.16) 이 모형은 여기서 파산한다. 육체를 제거하기 때문에, 게이머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상호작용적 서사’라고 포장한다고 해서, 게임의 행동이 서사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왜 게이머는 몹에게 공격을 받을 때 아파서 소리를 지르는가, 왜 캐릭터가 사망하면 그토록 분노하는가. 과연 이러한 지각을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과 동일하게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내 ‘밖’에 있는 내게서 ‘고통’을 느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며, 실제로 가능했다. 메칭거, 블랑케, 헬겐해이거는 브루거의 실험을 확장해, 피험자 A의 뒷모습을 촬영해 전송하는 동시에, A의 등을 막대기로 건드렸다. 실험결과는 놀라웠다. “촉각과 시각이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에서 착각이 시작되면, (모두는 아니고) 몇몇 참가자는 자기 몸에서 2미터 정도 앞에 놓인 가상의 몸이 위치한 곳에서 촉각을 보고했고, 가상의 몸을 자기 것처럼 느꼈다.”17) 이 실험모형을 게이머 일반의 조건(기술적으로 체계적인 자기환영의 구축)으로 상정하면, 이 같은 게임의 세계, 혹은 메타버스 같은 가상현실 플랫폼이 예비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적 매체가 지각의 학교라면, ‘육체를 표상하는 뇌지각의 재구성’일 것이다. 그곳을 세계라고 한다면, 이 과정은 일종의 이주일 것이다. 하지만 이주의 형태는 모호하고 은밀하다. 단순히 지역만 이동하며 끝나지 않는다. 육체적 지각의 이전인 동시에, 기술적 매체로 처리된 정보의 이전에 가까울 것이다. 황량한 가상현실에서 애나의 캐릭터처럼 각자의 잭스를 안고서 자장가를 불러줄 날은 멀지 않았다.
9. 마이크가 의장입니다. 당연하지요.


조금 과장해서 현재의 게이머는 RPG를 하면서 육아를 ‘대체’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을까. 아마도. 캐릭터를 ‘키운다’고 말하는 어법은 자연스럽하다. 과거 반 친구를 그리워하듯, 오그리마의 여관에 장기투숙하던 NPC 가논의 안부가 궁금할 수 있는 것이다.18) 사실, 육아‘만’이면 괜찮을 수도 있다. 연애도, 우정도, 기타 감정까지 하나씩 갈음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예를 들어, 최근 한국의 출산율 문제를 생각해 보자. 결혼 적령기 인구계층이 연애도 결혼도 안 하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인구를 증가시킬 것인지 여러 관계기관이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출산은 그렇다 쳐도, ‘연애’를 과연 안 하고 있는지는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연애의 대상이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을까. 동물, 물건, 아이돌, 캐릭터 등, 대상이 다만 사람이 아닐 뿐이라고. 사실, 과거의 상상력은 지금보다 과격했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1966)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마이크는 아예 혁명의 지도자 아담 셀리니로 재탄생한다. “제가 살아 있는 겁니까?” “의미론을 가지고 따지진 않겠네. 당연히 자네는 살아 있어!” 그/녀는 마치 레닌이 미래에 현현한 듯, 혁명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수행하고, 압제자 지구연방에 맞서 달세계의 해방을 마침내 실현한다. 그에 비하면 잭스는 너무나 온순하다. 물론, 현재 과학이 발전한 만큼 과거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과거의 상상력과 현재의 현실성 사이의 간격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10. 타자는 NPC다


이제야, 제목의 이유를 설명하겠다. 사실 제목은 ‘미끼’에 가까웠다. 제목만 보면 거창한 철학 논문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타자’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그렇게 지은 까닭은 우연히 접한 글에서 비롯됐다. “요즘 애들은 다른 사람 NPC 취급하는 거 진짜더라.”19)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이러쿵저러쿵 품평하진 않을 것이다.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놓고 ‘NPC’ 취급할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알아차린다고? 어느 순간 NPC가 되어 버린 직원, 타인을 NPC로 지각하는 사람, 그렇게 NPC 취급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 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까지 배웠던 ‘양식’은 NPC적 지각으로 대체됐다는 것을 말이다. 

최근에 게임 플랫폼 스팀에 오랜만에 접속했을 때, < 도타 2 >를 자주 같이 했던 친구 한 명이 말을 걸었다. 괜찮냐고, 왜 그리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았냐고. 거의 4년 만에 접속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했다.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다고, 힘든 시간은 지나갔고, 지금은 행복하다고.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말을 걸었던 저 친구가 NPC인지 내가 구별할 수 있을까. 이제 인간 모두는 튜링 검사를 받는 상황이 된 게 아닐까. 망상일 것이다. 현실이라면 악몽일 테니까. 하지만, 직사각형 채팅 창은 전형적인 튜링검사였다. 그리고 이 창들은 게임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핸드폰에도 컴퓨터에도 현실의 무수한 스크린에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튜링의 유령은 온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 어느덧 내가, 네가, 우리 모두가 알던 세상은 사라진 것일지 모른다. 예술가는 꿈을 꾸었고, 과학자는 실현했다. 꿈은 끝났고, 그들의 시대가 왔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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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2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도서출판길, 2007, 90쪽. 
2) 사냥꾼은 < 와우 >의 직업 중 하나고, 여러 야생동물을 길들여 소환수로 사용한다.
3) 원글의 주소를 올리고자 검색해 보았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고 너무 많은 글이 있기에 찾을 수 없었다.
4) “어렸을 때는 다이앤 포시와 제인 구달처럼 아프리카로 가고 싶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유인원의 수가 너무나도 줄어 있었기 때문에 동물원에서 일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상 애완동물의 조련사가 되라는 제안을 받았다. 애나의 경력자체가 자연계의 축소를 축약해 보여주고 있었다…가상원숭이들을 조련하는 건 사실 테스트스위트test suite(소프트웨어 적합서을 검사하기 위한 시험케이스 집합)를 돌리는 일보다 재미있을 지도 몰라.”(테드 창, 『소프트웨어객체의 생애주기』, 북스피어, 2013, 17)
5) 같은 책, 100쪽. “디지언트는 만점을 받을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서 노는 비디오게임이 아니다.”(35)
6) 이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민감한 주제기도 하다. 장식이상이라는 것은 게임행위라는 것이며, 결국은 게임을 대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ay to win’, 과금한 사람이 유리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7) 흥미롭게도 현실처럼 이면의 모습도 존재한다. 어쩌면 게이머만큼 초기형 인공지능에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동사냥 프로그램, 이른바 ‘오토’는 인기 있는 MMORPG에서 흔하게 목격된다. 한편으로 게임경제를 망치는 주범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캐릭터의 편안한 성장을 돕는 발판으로 간주된다.
8) 시대별 지역별 개인별 지각구조의 변화는 ‘문신’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애초에 특정집단의 낙인 같은 정체성이었지만, 오늘날 피부는 교체가 ‘조금’ 비싸고 불편한 옷일 따름이다. 적어도 누구에게는 말이다. 정확히는 문신이 아니라, 살갗을 대하는 ‘지각’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9) “예술의 전 영역에서…지각구조의 변화를 가리키는 징후라고 할 수 있는, 정신분산 속의 수용은 영화에서 그 고유한 연습수단을 갖고 있다.”(벤야민, 92). 일찍이 초기의 영화관람이 산만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영화 < 시네마천국 >에서 관객은 요란하게 서로 간에 대화하며 관람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태도에서 관조적 침잠이 아니라 비판적 산만의 가능성을 보았다. 작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것이 유명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다) 그랬던 경험이 어느 순간 시체처럼 육체를 억압하고, 독서하듯 집중하는 방식으로 변모한 것이 현재다.
10) 아난타스와미,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뇌과학이 밝힌 자아의 여덟 가지 그림자』, 더퀘스트, 2023, 281쪽.
11) 같은 책, 283쪽.
12) 같은 책, 286~287쪽.
13) “통합에 장애가 생기면, 마치 몸에 대한 표상이 하나라 아니라 두 개인 것처럼 되어 어떻게든 자아를 고정시킬 표상 하나를 골라야 한다. 어느 표상을 자아위치, 자아식별, 일인칭 관점에 불어넣을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신체적 자아를 규정하는 세 가지 지표(자아위치, 자아식별identification, 일인칭 관점)가 두 신체 표상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할 때,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하나의 표상이 기하학적 좌표인 물리적 몸에 자리 잡지 못해 환각이 일어난다.”(같은 책, 309쪽)
14) 게이머에 따라 이 지각적 교란의 흔적은 종종 관찰된다. 게이머에 따라 다르지만, 경주게임을 할 때 자동차의 운동에 따라 자기 몸을 기울이는 등, 자기가 조종하는 캐릭터에 몸을 맞추는 경험은 희귀한 게 아니다.
15) 쉬벨부쉬, 철도여행의 역사, 궁리, 1999. 9장 철도사고, 철도척수, 외상성 신경증을 참고할 것.
16) 수용자중심적 해석모형처럼 변종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정전canon 같은 텍스트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며, 기껏해야 독자·관객의 적극적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창작과비평사, 1989, 2장 참고)
17) 아난타스와미, 298~299쪽.
18) 가논은 나름 오그리마지역의 ‘명물’ 같은 존재다. 그래서 간혹 유저들이 합심해 ‘공격’하는 이벤트를 벌이곤 한다.
19) https://theqoo.net/square/3709683825. 여기에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콘서트 대기하는데 내 앞에 와서 자기들끼리 속눈썹 붙인 건가? 아닌가? 누구 닮았다 어쩐다 얘기하고 사람 NPC 취급함.” 그중 한 가지 인상적인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