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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 사북 > – 과거와의 지연된 조우
이승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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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눈 덮인 산 속으로 빨려가듯 이동하는 기차 풍경에서 시작한다. 기차가 안내하는 곳은 한때 광부의 도시였던 그러나 지금은 강원 카지노가 있는 사북이다. 눈 내리는 산 위에 우뚝 선 녹슨 망루와 “폐광 속에 희망의 꽃을 피우다”라는 정갈한 현수막과 마을 곳곳에 세워진 광부들의 조각상 그리고 “대통령이 오신 우리 마을”이 새겨진 돌비석이 연이어 소개된다. 영화는 겹겹이 쌓이고 벗겨진 표면을 통과해 현재 속 과거가 여전히 숨쉬고 있는 역사적 장소로 우리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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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제목이 시사하듯 1980년 사북항쟁을 담는다. 광주 민주항쟁 이 전에 이미 공수부대가 투입된 사건이지만 기록은커녕 말조차 꺼내지 못한 채 개인의 트라우마로 응어리진 사북의 이야기이다. 한국사에서 지역명은 종종 역사의 얼룩을 표상한다. 제주 43항쟁, 거창 양민학살, 광주 민주화운동과 같이 국가폭력과 개인의 트라우마가 뒤얽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역사적 장소가 있다. 사북항쟁도 그렇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걸쳐 동양 최대의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부와 그 가족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거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정돈된 문장이 사북항쟁을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 한 문장을 기술하기 위한 지난한 진상규명의 과정과 투쟁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다. 사실 “사북의 봄”은 짧았고 이후 내내 보복의 칼바람이 혹독했다.

영화는 사북에서 나만 탈출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황인욱 소장을 따라간다. 그는 사북 출신이고 아버지가 동원탄좌 광부였으며,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는 사북 사건 관련자들이 친구들의 부모이거나 자신의 가족이었다. 그는 직접 사건 당사자는 아니지만 경험자였고, 사건 내부자는 아니었지만 연관자였고, 사건을 직접 체화하지는 않았지만 망각하고 모른 척 살수도 없는 자리에서, 당시의 사건을 하나하나 되짚어 간다. 영화는 그런 그이기에 가능한 작업이고, 그런 그이기에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이 사건을 수년 동안 기록해온 감독의 자리이자 감독이 관객을 초대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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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먼저 4일의 사건 전후를 자료와 기억을 기반으로 접속한다. 당시 시대사를 담은 각종 미디어의 자료와 사건의 기록들과 미발표된 현장의 사진들을 바탕으로 당사자이자 생존자의 당시 기억을 일깨워 사북 사건의 기억의 지형도를 그려낸다. 그러나 사건 속에 묻혀 있는 당사자들의 기억에는 그들의 감정이 담겨있다. 영화는 침묵해왔던 개개인의 기억 저변의 양가적 감정과 트라우마를 말하게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영화는 사북 사건을 규명하는 진실에 차분하게 다가가지만, 하나의 시선,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진실의 정치학이 아니다. 그보다 사건 이면의 트라우마를 대면하며 기억의 정치학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조용한 경청 속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개별 진실과 복잡한 내면들이 품은 충돌과 모순을 짚어낸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광부들과 광부의 부인들, 경찰관, 신문기자들, 노동위원장 가족들의 말을 경청하는 속에 우리는 “경찰이 광부를 죽였다.”는 도화선 이면에 통제불능 광부들 속에서 경찰이 느낀 두려움과 광부에게서 구출된 경찰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시에 데스크 검열이 일상이던 언론 풍토 속에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던 기자의 두려움과 용기를 듣게 된다. 또한 공수부대로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을 환대하며 “대통령이 오신 마을”이라는 비석을 여전히 남겨두고 있는 오늘의 사북을 보여준다. 영화는 사북 사건을 단일한 시각과 해석으로 판단하거나 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면적 기억과 감정을 들추어 시선의 균열과 비판적 성찰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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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은폐된 과거를 복원하지만 목적은 현재에 있다. 트라우마는 당시가 아니라 나중에 경험되는 과거이다. 당시에는 충분히 인식되거나 표현되지 못한 고통과 경험이 억압된 채 남아 있다가 시간이 흐른 뒤 현재로 귀환한다. 트라우마는 이 공백을 무리하게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공백을 인식하고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게 하는 새로운 서사를 창출하는 것이다. 영화는 황인욱 소장에서 시작해 사건 당사자들의 트라우마를 풀어내는 현재의 여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후반부 이원갑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를 사로잡은 기억을 풀어내면서 점차 기억과 거리두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재정의 한다. 황인욱 소장의 말에 흔들리는 그의 표정 이후, 그가 한 행동은 트라우마의 극복이 잊음이 아니라 기억을 지닌 채 다시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용기임을 실천한다. 영화는 인물을 만나 과거 상흔을 재연하고 복기하는 것을 너머, 그 상흔이 현재를 어떻게 형성하는가를 가만히 일깨운다. 트라우마의 치유는 내면의 심리적 회복만이 아니라 가해자-피해자, 개인-집단, 과거-현재 사이의 관계 문제로 인식을 확장하는 여정 속에서의 윤리적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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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 사북 >은 은폐된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사건의 표면 속에 묻혀 제대로 말 되어지지 못한 개인의 트라우마를 풀어낸다. 역사쓰기가 제대로 된 한 문장의 기술을 위해 지난한 진상규명을 해내는 작업이라면, 영화는 문장 너머 여전히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을 관통해 “산업 전사”였던 광부들이 부서진 몸과 마음으로 가정폭력, 일용직 노동자, 농부, 스님으로 오늘을 살다 하나 둘 생을 마감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폭력과 사회의 불평등의 잔해 전면에 왜 서로 적대하고 있는 개인들이 남는 지 묻는다. 기이한 한국 현대사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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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 사북 >은 국내 양대 다큐멘터리 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와 EBS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각각 대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작품이다.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사느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