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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게임 Ⅲ
박성호(노드 NODE.)
동독의 미술가 위르겐 비트도르프(Jürgen Wittdorf, 1932-2018)의 《청년과 스포츠 Jugend and Sport》(1964) 연작은 동독 체육대학(DHfK)이 공식적으로 의뢰한 작품이지만, 작가는 이 작품 속에 퀴어적 도상을 은밀히 숨김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 리놀륨 판화 연작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내용은 동성애적인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샤워 중 Under the Shower〉(1964)에서는 나체의 남성들이 공동 샤워실에서 씻고 있으며 〈스포츠 학생들의 건설자 여단 Sports Students’ Builders Brigade〉(1964)에서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영웅상으로 볼 수 있는 벽돌을 쌓는 노동자들이 반쯤 옷을 벗은 채로 매우 친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서 근육질의 청년, 감각적으로 묘사된 신체, 여성의 부재와 남성 간 친밀한 구도 등은 표면적으로는 ‘건강한 사회주의 신체’를 구현하지만, 동시에 감시와 검열 체제 속에서 은폐된 욕망의 시각적 암시로 작동합니다. 비트도르프는 동독 체제하에서 허용된 주제인 ‘스포츠’와 ‘청년’을 통해 공식적 시선에 복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선의 각도, 신체의 긴장감, 표정의 미묘한 감정선 등을 통해 감각적 욕망의 우회적 시각화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퀴어 미학적 관점에서 일종의 ‘캠프 전략(camp aesthetics)’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당시 동성애가 법적으로는 비범죄화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낙인과 감시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작가가 선택한 감각과 욕망의 이중 언어(double coding)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트도르프의 작업은 단순한 선전미술이 아니라, 시각 권력의 통제 하에서 욕망이 어떻게 생존하고 은유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동독 붕괴 이후 그의 작업은 퀴어 미술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었으며, 이는 동독 내 예술이 지닌 비가시적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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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비트도르프, 〈샤워 중〉(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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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비트도르프, 〈스포츠 학생들의 건설자 여단〉(1964)
유고슬라비아 작가 브라코 드미트리예비치(Braco Dimitrijević, 1948-)는 《내가 만난 우연한 행인 Casual Passer-by I Met》(1971-) 연작에서 우연히 만난 평범한 시민들을 사진 찍고 그것을 거리에 대형으로 설치함으로써, 기념비라는 국가적 상징체계를 일상의 평면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이는 특정 위인을 기리는 서사 중심의 역사 기호 체계를 전유한 뒤, 이를 ‘익명의 행인’이라는 비권위적 주체로 대체하는 시각적 언어의 분열 전략입니다. 그는 기념비적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되, 그 내용에 급진적인 공백, 즉, 기억될 이유가 전혀 없는 인물의 무위함을 삽입함으로써, 기념의 정치성을 내부로부터 무력화합니다. 이 작업은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서의 ‘기념 체계’를 전복하는 예술적 실천이자, 권력과 기호 간의 결합을 느슨하게 만드는 동유럽 개념주의의 핵심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연작은 ‘기념’이라는 제도 자체의 의미 생산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미술 제도와 공공 공간의 위계적 질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그 위에 탈권위의 기호를 얹는 이중 전략은, 일상적이고 보잘것없는 얼굴을 역설적으로 거대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이는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자, 미래의 미술이 ‘이름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급진적 상상력의 시각적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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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코 드미트리예비치, 《내가 만난 우연한 행인》(1971-)
헝가리 미술가 타마스 센트조비(Tamás Szentjóby, 1944-)의 〈세 명을 위한 이동식 참호 Portable Trench for Three〉(1969)는 억압적 정치 체제에서 개인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이동식 구조물의 형태로 상상한 설치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개인이 집합적 정치 공간 속에서 물리적으로 사라지고 사유로부터 철수할 수 있는 은신처이자, 반전적 은유로 기능하는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참호라는 군사적 구조물은 원래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피하는 수단이지만, 여기서는 체제 내부의 감시와 억압으로부터의 은폐 장소로 전환됩니다. 이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자기 검열 공간’의 시각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1968 Czecho-Slovakian Radio 1968〉(1969)은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군이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고 공공 정보를 통제한 사건을 기억하는 작업입니다. 이 작품에서 센트조비는 감청당하고 통제된 정보 매체를 주제로, 언론의 자유와 말의 권리를 둘러싼 억압 구조를 드러냅니다. 작품은 특정 메시지를 직접 제시하지 않지만, 그 공백 자체가 체제의 침묵 강제, 언어의 제거라는 폭력을 드러냅니다. 두 작업 모두 전통적 조형 방식 대신 신체, 사물, 언어, 침묵을 매개로 한 개념적 구조를 통해, 물리적 폭력의 형상화가 아니라 기호적, 은유적 억압 구조에 대한 내면화된 반응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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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스 센트요비, 〈세 명을 위한 이동식 참호〉(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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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스 센트요비,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1968〉(1969)
지금까지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동유럽 개념주의 미술이 서구의 개념미술 아래 수용되었다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정치적 조건과 언어적 억압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비가시적인 저항을 전개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그로이스가 지적했듯이, 공산주의 체제는 단순한 물리적 통제나 검열의 시스템이 아니라, 언어와 기호를 매개로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총체적으로 언어화된 사회’였으며, 예술은 이 체제 언어에 침투하거나 그것을 교란할 수 있는 언어적 저항으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동유럽 개념주의 미술가들은 작품의 비물질화를 통해 체제가 강요하는 시각성, 물질성, 재현의 규범을 우회하고, 언어와 기호, 일상의 행위, 기록 등의 방식을 통해 비가시적이고 언어적인 저항을 수행하였습니다. 비물질화는 단순히 형식적 특성이 아니라, 통제된 체제에 대한 전복적 실천이었으며, 이러한 실천은 당대 공산주의 권력의 언어적·기호적 통제 속에서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작동하였습니다. 이처럼 동유럽 개념주의 미술가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언어적 권력 구조에 반하는 방식으로 예술적 저항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들의 작업은 단순한 형식 실험도, 서구적 수용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당대 공산주의의 억압적 현실에 대한 정교하고 은유적인 반응이자 전략적인 실천이었습니다. 이는 동유럽 개념주의 미술이 단순히 권위와 억압을 회피하고 우회하기 위해 비물질화된 미술이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의 권위에 저항하고 균열을 내는 언어적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다시 조명될 미학적·정치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Pavel S. Pyś, ed., Multiple Realities: Navigating Experimental Art in Central Eastern Europe, 1960s–1980s, Minneapolis: Walker Art Center, 2024.
Josie McLellan, Love in the Time of Communism: Intimacy and Sexuality in the GD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Andrea Reuter, Queer Visibility in Post-Socialist Europe, ed. Lisa Downing and Robert Gillett, “Queer Bodies in Socialist Realism: Re-reading Jürgen Wittdorf’s ‘Youth and Sports’,”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2.
Heike Greschke, Jürgen Wittdorf: Der stille Rebell, Berlin: Schwules Museum, 2013.
Piotr Piotrowski, In the Shadow of Yalta: Art and the Avant-Garde in Eastern Europe, 1945–1989, London: Reaktion Books, 2009.
Braco Dimitrijević, Tractatus Post Historicus, Zagreb: Gallery of Contemporary Art, 1976.
Klara Kemp-Welch, Networking the Bloc: Experimental Art in Eastern Europe 1965–1981, Cambridge, MA: MIT Press, 2018.
Maja and Reuben Fowkes, Central and Eastern European Art Since 1950, London: Thames & Hudson, 2020.
Edit András, The Politics of Space: Tamás Szentjóby’s Portable Trench, ArtMargins, Vol. 4, No. 2–3, 2015.
Sven Spieker, The Big Archive: Art from Bureaucracy, Cambridge, MA: MIT Press,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