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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게임 Ⅱ
박성호(노드 NODE.)
미술이 비물질화되는 경향은 일반적으로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특성으로 많이 해석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체제 내에서 개념적이고 비물질적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서구의 개념미술과는 구분되는 개념주의 미술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루시 리파드(Lucy Lippard, 1937-)의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하고 물질적 형식은 부차적이고, 싸고, 가볍고, 가식이 없거나, ‘비물질화’된 작품”이라는 개념미술의 정의 속에는 서구의 상업화된 미술제도와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1945-)의 “개념으로서의 개념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정의나 토니 고드프리(Tony Godfrey)의 “형태나 재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개념과 의미에 관한 것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라는 정의는 미술 그 자체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미술이 가진 오브제성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1999년 뉴욕 퀸즈 미술관에서 열린 《글로벌 개념주의: 기원의 지점들, 1950년대-1980년대》 전시는 개념미술과 개념주의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의 여파로 발전한 본질적으로 형식주의적 관행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용어인 개념미술과
물리적 형태와 시각적 인식에 대한 예술의 역사적 의존성을 결정적으로 깨뜨린 개념주의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념주의는 예술 작품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축소하면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현실에 대한
예술가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다양한 작품과 관행을 요약한 광범위한 태도적 표현이었다.
개념주의의 비공식성과 집단성에 대한 친화성은 격렬하고 변혁적인 시기에
대중과 보다 직접적인 소통을 갈망하던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들에게는 대상의 탈중심화, 즉 비물질화가 예술적 초점을 대상에서 예술 행위로 옮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즉 개념주의 미술은 미술의 목적, 기능, 능력, 지위, 의미에 대해 재고하면서 각 지역의 역사 또는 사회와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미술이었습니다. 이 미술 경향은 오브제에서 아이디어로 중요성을 이동시키고 시각성보다는 언어를 우선시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미술은 금지된 발언의 대리인, 새로운 사상과 신념의 제시, 저항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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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개념주의: 기원의 지점들, 1950년대-1980년대》 전시 전경
그러나 비물질화가 대상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동유럽에서의 개념주의 미술은 서구의 개념미술과 비교했을 때 매우 엄격한 비물질화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연함, 탄력성, 아이러니, 유머, 모호함을 이용하여 오브제를 의미 전달의 주체로 재정의했습니다. 물질적 실체에 대한 회피는 공산주의와 같은 엄격한 사회 체제하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기에는 매우 위험한 정치적 저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 1958-)의 개념미술 이후의 미술(postconceptual art) 논의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본다면 개념주의의 비물질화는 미술의 ‘무한한 확장’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제 미술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시공을 넘나드는 분산된 존재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술이 비물질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물리적 형태로부터 지각적으로 추상화되는 과정인 이미지의 비현실화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지에서 언어로 전환된 미술은 각 지역의 시간성과 공간성 안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경우와 맞물리며 이제 하나의 사건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개념미술과 구분되는 개념주의 미술의 또 다른 특징은 비판 표적의 확장입니다. 개념미술을 주로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미술제도와 모더니즘 미술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면 개념주의 미술은 사회 제도를 그 표적으로 두고 자신의 비판성을 개진해 나갑니다. 즉, 개념주의 미술은 미술 제도의 위계적 권력 구조와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뿐 아니라 글로벌 미술 담론에서 중심과 주변의 문화적 관계까지 문제 삼고 비판하며, 미술사의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재구성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동유럽의 개념주의 미술은 서구의 개념미술과 달리 실존적이고 체험적인 차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작업은 국가 권력에 의해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검열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유럽 작가들의 실천은 단순한 형식적 실험을 넘어서 정치적 제도에 대한 실질적인 개입으로 작동하였습니다. 이러한 개입은 종종 작품의 비물질화를 통한 전략적 언어 행위, 다시 말해 일종의 언어게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동유럽의 작가들은 검열을 회피하고 통제적 감시를 피해 가기 위해, 시각적 표현보다는 언어 중심의 작업 방식을 채택한 것이죠. 이와 같이 언어화된 작업은 언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공산주의 체제와 직접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념 언어와 미술 언어 간의 대립은 동유럽 개념주의 미술의 저항적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미술은 더 이상 수동적인 형식이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과 담론의 질서를 교란하는 비물질적 실천이 되었으며, 이는 체제 내에서 미술이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 것입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참고자료

루시 리파드, 윤형민 역, 『6년: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오브제 작품의 비물질화』, 현실문화연구, 2023.
토니 고드프리, 전혜숙 역, 『개념 미술』, 한길아트, 2002.
Desa Philippi, Matter of Words: Translations in East European Conceptualism, e-flux journal, no. 28, 2011.
Joseph Kosuth, Art After Philosophy and After: Collected Writings, 1966–1990, MIT Press, 1991.
Luis Camnitzer, Jane Faver, and Rachel Weiss, Global Conceptualism: points of origin, 1950s-1980s, New York: Queens Museum of Art, D.P.A., 1999.
Peter Osborne, Anywhere or Not at All: Philosophy of Contemporary Art, London: Verso, 2013.
Terry Smith, One and Five Ideas: On Conceptual Art and Conceptu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