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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미학적 전환
박준석(노드 N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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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Higinbotham, Tennis for Two, 1958
누군가는 게임을 예술의 범주 내에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게임의 미적 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게임이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술과 게임 모두 창작 행위를 전제하고, 관람자(플레이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면, 게임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게임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술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겠지만, 필자는 ‘게임이 예술인가?’라는 이분법적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예술과 게임이라는 기술 매체가 만나는 지점, 즉 그 교집합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기술 매체의 발달로 게임은 단순한 놀이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인간의 ‘행위’를 통해 다양한 결과값을 도출하고, 그것을 ‘기억’하는 매체로 진화하였다. 응우옌(C. Thi Nguyen)은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게임은 행위성을 기록하는 예술”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게임의 창작자가 플레이어의 행위를 유도하고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에 도달하도록 이끈다고 주장한다. 응우옌은 게임의 미적 가능성을 옹호하며, 플레이어의 ‘행위성’과 그 과정을 통해 얻는 경험의 가치를 ‘분투형 플레이(struggle play)’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분투형 플레이란 ‘승리’를 목표로 하지 않고, 게임 내에 창작자가 만든 규칙과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플레이어는 자발적으로 다양한 행위를 통해 경험을 확장하고, 그 과정에서 미적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과정’조차도 결국은 승리라는 목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본다. 플레이어에게 승리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목표이기에, 결국 창작자가 설계한 공간 안에서의 행위성을 통해 다양한 경험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승리를 위한 과정이 의미를 가지며, 그 과정이 승리를 더욱 성취감 있게 만든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 중심의 행위성’은 미술의 영역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을까? 과거 순수미술은 감상 중심의 정적인 경험을 제공했으며, 작품은 미적 아름다움과 이상적인 형태를 중시하고 관람자는 수동적인 감상자로 머물렀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은 관람자의 참여와 해석을 중시하며, 정치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통해 관람자와 능동적으로 소통하려 한다. 이로 인해 미술 감상의 방식도 정적 관조에서 체험과 상호작용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예컨대 인터랙티브 아트와 같은 형식은 관람자가 작품에 직접 참여하여 만지고, 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등의 ‘행위’를 통해 작품과 소통하게 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관람자의 참여 없이는 완성되지 않으며, 행위 자체가 작품의 일부분이 된다. 인터랙티브 아트에서 관람자는 각자의 목적(미적 체험, 작가의 의도 해석, 기술적 흥미 등)을 따라 행위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얻게 된다.

가령, 키네틱 아트 작가 박종영의 작품 은 관람자가 버튼을 누르면 양발과 머리카락이 상하로 움직이고, 오른손이 좌우로 흔들린다. 마치 누군가를 환영하듯 손을 흔들지만, 인형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관람자의 행위로 작품이 움직이고, 이 움직임을 통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하게 된다. 어떤 이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리플렛을 읽거나, 작가의 다른 작업을 조사하는 등 작품을 해석하려는 다양한 행위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하여 이 작품의 모티브가 사회 구조 속에서 피해자가 된 성노동 여성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작품의 기계적 움직임에 흥미를 느껴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며 기술적 구조와 조형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처럼 하나의 작업은 관람자의 행위를 통해 여타의 경험과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의 ‘기억의 외재화’는 응우옌의 논의를 더욱 확장시키는 개념으로 다뤄질 수 있다. 응우옌에 따르면, 게임의 창작자는 행위성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고,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스티글레르는 인간의 기억이 뇌에만 내재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기술 매체를 통해 구성되고 전달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게임에 적용해 보면, 게임 속에는 개발자의 경험과 가치관, 의도(기억)가 외부 매체에 외재화 즉, 저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플레이어는 게임 환경 안에서 조작, 선택, 문제 해결 등 다양한 행위성을 통해, 그 안에 담긴 개발자의 기억 조각들을 마주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이다. 능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플레이어는 스스로 생각하고 해석하며, 때로는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른 예상치 못한 경험과 의미를 만들어낸다. 창작자의 외재화된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복제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게임들은 단순한 목표 달성을 넘어서,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해석하며 감정적으로 반응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게임은 인터랙티브한 매체의 특성을 통해 관람자와 예술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응우옌과 스티글레르의 논의를 통해, 게임과 예술이 교차하는 중요한 지점들을 살펴보았다. 결국 "게임이 예술인가"라는 이분법적인 논의보다는, 게임을 포함한 다양한 인터랙티브 시도들이 관람자에게 어떤 새로운 인식과 감각, 사고의 방식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유의미하다. 예술의 정의가 고정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만큼, 게임 역시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미학과 감각 체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예술적 실천과 어떻게 교차하고 확장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행위성’의 문제는 동시대 예술 일반을 연구함에 있어 주요한 쟁점이며, 앞선 논자들의 ‘가치 학습’, ‘정신 약학’에 관한 논의가 이러한 문제 의식을 확장하는데 주요한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