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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게임 Ⅰ
박성호(노드 NODE.)
일반적으로 1991년 소련의 해체는 40여 년간 이어진 냉전의 종식과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 세계가 경제적 공동체로 엮이게 되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렸죠. 이후 공산주의에 대해 유럽의 지식인들은 현실 공산주의를 실패로 진단하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해 나갔습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관료적 억압과 폭력, 정체된 권력구조, 대중 참여의 부재를 예로 들며 “공산주의가 실패했지만,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도 아니며 지금도 공산주의라는 대안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국가의 권력 독점과 평등의 실현 실패를 근거로 ”공산주의가 실패했지만, 공산주의라는 가설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태생의 러시아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 1947-)는 지젝과 바디우의 견해와 달리 소비에트 연방을 공산주의로 간주하며 공산주의 사회를 권력과 권력을 향한 비판이 동일한 매개, 즉 언어를 매개로 작동하는 사회로 정의했습니다. 즉 소비에트 연방은 어떤 사회보다도 더 멀리 공산주의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죠.

그로이스에 따르면 언어를 매개로 작동했던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권력’은 스스로를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이라고 규정했으며 집권당이 되어 자신을 사회의 중심부로 옮긴 뒤 정과 반이 공존하는 총체적인 사회를 구성했습니다. 변증법적인 사고란 대립하는 두 물질의 역설 속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즉 변증법적인 세계 속에서 개인의 의식은 모순에서 도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삶을 지배하기 위해서 역설을 통해 삶을 포착할 것을 추구합니다. 달리 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오로지 전체, 측 총체성(Totality)만이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a를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a의 부정이 금지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a의 부정이 금지된다면, a의 부정은 전체에서 배제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체는 전체로서 살아 있는 것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인은 소비에트적이면서 반소비에트적인 사고를 동시에 하는, 즉 총체적으로 사고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대립을 부정하거나 근절하지 않고 더욱 첨예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사회는 언어화되며, 모순에서 자유로운 말은 없기에 자본주의의 총체성이 돈을 매개로 나타나는 것과 반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역설적인 언어를 통해서 총체성이 나타납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들이 언어화될 때, 그것이 모순과 역설로 점철되어 있을지라도 사회 속 모든 사람은 비로소 권력과 자신의 삶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합니다. 언어는 평등의 매개물이며 권력의 언어화는, 그것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발화자의 평등이라는 조건에서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는 언어를 매개로 모든 정치적 결정, 삶, 발화, 예술적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였기에 a에서 b로, b에서 a로 무수히 이동하는 사유 변경이 항상 요청되었습니다. 이는 그로이스가 언급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 개념에서도 확인됩니다. 메타노이아라는 개념은 원래 종교적인 의미로 ‘개종’을 의미했지만, 그는 공산주의 사회와 연결해 이 용어를 하나의 사회적 상황에서 또 다른 상황으로의 끊임없는 전환, 종결, 시작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즉 이것은 이전과 똑같이 하지 않는 것, 평범한 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 일상적인 쳇바퀴를 그만 굴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메타노이아가 외적 상황이 없을 때, 즉 사유 변경을 자극할 만한 아무런 요구가 없을 때도 발생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타노이아는 우리가 외적으로 주어진 제한을 스스로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충동에 따라 사회가 제공하는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자기 제한을 통해서만이 주권과 자치가 획득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다른 관점과 다른 사유를 행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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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보미르 두르체크(Ľubomír Ďurček), 〈ROH/혁명적 노동조합 운동(1987년 5월 9일) ROH/Revolutionary Trade Union Movement(9 May, 1987)〉 (1987)
삶의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사유되는 과정에서 당집행부는 이제 전체 세계를 질료로 다루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가에게 있어서 현실 그 자체는 자신의 예술적인 구성의 질료였습니다. 따라서 그림, 조각, 한 편의 시를 생산하려는 계획을 세운 예술가가 질료의 사용 권한을 소유하듯이, 그는 자연적으로 자신의 예술적인 계획에 따라 실제의 질료(세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권한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즉 소비에트 사회에서 예술가는 세계를 재현하고 표현하는 자에서 세계를 재구축하는 자로 변환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그로이스는 스탈린을 주목합니다. 스탈린은 그의 시대에서 예술을 통해 삶을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세계 자체를 예술적으로 조직하고 재구성하려는 ‘삶의 구축’을 지향했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예술 의지는 궁극적으로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현실 정치 속에서 실현되었으며, 공산주의 사회는 아방가르드가 꿈꾼 유토피아적 계획의 실현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총체적 예술 작품으로 기능하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성취물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언어는 삶의 토대, 정치적 결정, 권력의 획득 등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총체성 안에서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작동했습니다. 당집행부는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통제, 변형, 검열하며 이것을 전유한 듯 보였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개인이건 단체건 간에 사회의 모든 구성의 토대가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공산주의가 이식된 동유럽 국가의 지도부는 언어를 사용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사회를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예술가들 또한 언어를 통해 권위에 저항하거나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즉 공산주의 국가와 예술가들은 언어로 대립한 것입니다. 총체성 속에서, 역설로 점철된 언어의 사용은 끊임없는 메타노이아의 진행이었습니다. 하나의 주장이 나오면 그것은 즉각 반박될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어가 평등의 매개물이며 누구나 그것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 방식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사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외쳤던 인민들은 사실상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 1980년대 러시아의 반체제운동이나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 등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저항은 막강한 군사력 앞에 모두 억압되었습니다. 또한 제도적으로 따져보아도 소련의 노멘클라투라, 폴란드의 출판·공연 검열청, 동독의 국가보안부 등 많은 검열기관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감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직접성이 드러나는 저항은 그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상황과 연관되어 예술가들은 검열과 억압을 회피하면서도 그 저항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비물질적으로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억압적인 정치 체제를 가진 국가에서 작업의 비물질화는 값이 싼 재료로 작업을 만들 수 있었고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예술가들이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기에 전시와 관련하여 국가의 통제력을 무너뜨리기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또한 공식 미술을 우회하여 신속하게 비공식적으로 전시가 조직될 수 있었으며 유연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검열을 피하기가 쉬웠습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참고자료

Alain Badiou, The communist hypothesis, London: Verso, 2010.
Costas Douzinas, Slavoj Žižek, The Idea of Communism, London ;. New York: Verso, 2010.
Pavel S. Pyś, ed., Multiple Realities: Navigating Experimental Art in Central Eastern Europe, 1960s–1980s, Minneapolis: Walker Art Center, 2024.
보리스 그로이스, 김수환 역, 『코뮤니스트 후기』, 문학과지성사, 2017.
보리스 그로이스, 최문규 역, 『아방가르드와 현대성: 러시아의 분열된 문화』, 문예마당,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