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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_이름을 잃어버린 공간 
손민효(설치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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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대구예술발전소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설치미술가 손민효입니다.
 
 
2.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저는 누나들과 나이 터울이 큰 늦둥이인데, 집에서 막내인 제 말을 어른들이 잘 들어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나의 시선에서 보이는 것들이 가족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죠. 제가 보고 생각하는 바를 들어달라고 이야기하고, 설득했던 기억이 있어요. 어떨 때는 그게 말로 다 표현이 되지 않아서 행동으로 드러내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거나 뭔가 만드는 것도 제가 뭔가 이야기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내가 원하는 것,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형상화하는 데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작가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자기가 전하고 싶은 바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지 보면서 미술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설치미술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학부 시절에는 키네틱 아트나 코딩을 주로 해왔는데요. 사실 가장 관심 있는 것은 개념미술이었어요. 움직임이 있는 작업은 분명 보는 재미가 있지만, 이러한 부분 때문에 되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묻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동 원리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의미보다는 방법에 집중하게 되고, 어떨 때는 이 움직임에 개념을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어요.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느끼고 있어서 보다 간결하게 제가 생각하는 바를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형화된 혹은 직관적인 작업이나 미적 감흥을 느끼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보다는 관람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데요. 가령,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9- )와 같은 작가의 설치 작업을 보면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이렇듯 작업을 마주하고 고민하는 동안에 어떤 개념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저는 설치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영상이나 사진 콜라주를 포함한 여러 장르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설치가 가장 재밌는 것 같아요. 설치미술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장르에 구애받지 않다 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작업의 폭이 넓어져요. 특히 저는 공간을 보고 그곳에 맞추어 작업을 진행하는데, 전시 장소의 벽, 바닥, 천장을 포함하여 그 공간의 모든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업의 자유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회화는 어떤 부분에서 분명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설치 작업이라고 해서 회화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에요. 회화도 설치의 일부로 수용될 수 있죠. 그런데 설치는 회화가 되지 못하지만, 회화는 설치의 범위 내에서 활용이 가능하니까. 이렇듯 장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제가 설치미술을 주로 하게 된 이유인 것 같아요.
 

4. 지금까지 했던 작업 중 자신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어떤 작업인가요.
 
저는 보통 한 작업이 끝나고 나면, 연작이 아니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나 주제, 재료를 사용한 새로운 작업을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났다기보다는 드러내고자 했던 바가 가장 적절하게 구현된 작업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대구 예술발전소의 《다파티스트(DAFARTIST) 프리뷰》에서 공개되었던 〈휴먼-버드 시리즈, Human-bird Series〉(2024)가 그랬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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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버드 시리즈, Human-bird Series〉(2024)
5. 대구 예술발전소의 레지던시 협업 교류전 《유연한 틈; 시선의 그림자》에 전시된 < 이름을 잃어버린 공간 >(2024)에 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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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잃어버린 공간 >(2024)
이 작업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과 그들 간의 관계에 관한 고민에서 시작되었어요. 저는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들을 배척하며 우리의 공간을 공고히 해왔다고 생각하거든요. 가벼운 예로 저는 제 방에 벌레가 들어오는 것이 싫고, 심지어는 우리 가족이나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닌 바깥의 사람이 들어오는 게 싫어요. 예전부터 비인간, 타자에 대한 밀어냄이 자연스럽게 행해졌던 것 같아요. 물론 저도 그렇게 해왔겠죠.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원래 동물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새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새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문득 ‘우리는 계속 저들을 밀어내고 있고 미처 밖으로 나가지 못한 일부가 도심에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저들과 공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만 하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이 밀어냄이 인간들 사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흔히 ‘혐오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현 상황과 여러 사회적 이슈에 관해 어떨 때는 그저 싸움 구경하듯 재밌게 지켜볼 때도 있는데, 예전에는 그러한 일들이 잦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배척을 통해 자기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제는 같은 종끼리의 싸움이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버드가드’는 새들이 앉지 못하게 막는 가시 장애물인데요.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설치하는 것인데, 비인간을 향해 있던 저 가시들이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저 가시가 누구를 향해 있는가.”하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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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앞선 < 휴먼버드 시리즈 >와 < 이름을 잃어버린 공간 >은 어떤 부분에서 연결되는지 혹은 의미의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휴먼버드 시리즈 >는 버드가드의 가시들을 안쪽으로 말아서 사람의 키에 맞추어 설치해 둔 구조물인데요. 해당 구조물에서 가시는 바깥쪽을 향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새에게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오가기는 불편해진 거죠. 당시에는 인간과 비인간 타자에 관해서 어느 정도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만든 구조물에 도리어 우리가 방해를 받는 역지사지의 경험을 겪게 하고자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이 생존을 위한 방법의 하나였고,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름을 잃어버린 공간 >에서 저는 전시 공간을 여러 부분으로 분리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는 버드가드에 의해 주변과는 독립된 공간도 있고,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 버드가드의 가시가 안을 향하고 있는 공간, 밖을 향하고 있는 공간도 있는데요.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또 어디가 중심인지 모호한 경계와 공간들을 만들어내면서 안쪽과 바깥쪽, 안전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어디인지, 이것이 누구의 공간이고 이 가시들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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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휴먼버드 시리즈 >와 < 이름을 잃어버린 공간 >의 작가 노트를 보며 각 작업에서 ‘새’가 의미하는 바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선 작업에서 새는 현대 기술문명의 발전에서 도태된 혹은 소외된 인간에 비유되었는데, 최근 작업에서는 비인간 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더라고요.
 
맞아요. ‘새’가 지시하는 바를 보다 확장된 의미로 가지고 가고자 했는데요. < 휴먼버드 시리즈 >에서 새의 의미는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연결됩니다. 저는 새를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데, 어느 날 새벽에 큰 사거리에서 까마귀가 제일 높은 가로등에 앉아 있는 걸 봤어요. 거기 나무들도 되게 많았는데 거기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좀 의아하더라고요. ‘쟤들이 저곳을 선택해서 앉은 건가? 본능적으로 주변을 내려다보기 좋은 가장 높은 곳이라 저기 있나?’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새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들의 삶의 방식은 지금 우리 세대와는 다른 것 같아요. 어떤 부분에서는 도태되고 있죠. 이렇게 소외되어 가는 사람들에 관해 생각해 보니 인간 간,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 관해 고민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의미의 확장이 있었던 것 같아요.
 
 
5-3. 우리가 인간에게 불필요한 어떤 것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는 되게 많잖아요. 그 중에서도 ‘버드가드’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이어가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해당 작업에서 버드가드는 일종의 경계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요. 투명한 소재를 사용한 ‘경계 지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질문드립니다.
 
사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따로 언급한 적은 없는데요. 고속도로나 아파트 단지에 조류 충돌 방지 필름이 붙어있는 벽이 있잖아요. 투명한 벽에 맹금류 스티커를 붙여놓았는데, 사실 그게 크게 유효하지 않다고 해요. 지금은 점자나 십자 모양을 표시해서 새들이 벽을 인지하고 피할 수 있게 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많이 죽죠. 가까이 가서 보면 새들이 부딪힌 자국이 투병한 벽에 그대로 남아 있고 주변에 죽은 새들의 사체가 널려있어요.
거기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출발했던 것 같아요.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럴듯한 장치를 마련해 둔 것처럼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인간의 기준에서 미관상 보기 좋으라고 투명하게 만드는 거잖아요. 투명함이 가진 이중성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안이 보이지만 막혀있는 것이니까요. 그때부터 투명한 장애물에 관해 찾아보기 시작했고, 투명한 버드가드로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6. 인간과 비인간 타자의 대립이라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 이름을 잃어버린 공간 >이라는 작품의 제목은 어떠한 의미에서 연결되는 걸까요.
 
저는 ‘이름’이 사물에 어떠한 힘을 부여한다고 생각해요. 생명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부르는 명칭이 있다는 건 어떠한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전시실 내의 저 공간들은 어떤 누구의 공간인지,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 특정 짓기 어려워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없네.’라는 생각에 이름을 잃어버린 공간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자연생태공원이나 OO 도심공원과 같은 이름을 붙인 곳 있잖아요. 그런 곳을 보면 마치 그들(동, 식물)을 위한 어떤 정책이나 방안을 마련해준 듯 보이지만 정말 그 공간이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인지,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렇다 보니 그러한 곳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잃어버렸다는 것은 원래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잖아요. 사실은 모두의 공간이었던 거죠. 우리 집, 새집이나 아파트, 공원은 각각 ‘누구의’ 혹은 ‘어떠한’ 공간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을 뿐, 애초에 ‘모든 공간은 모두의 공간이었다.’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밀어내기, 경계 짓기가 어떠한 명칭을 붙였을 뿐이죠.
 
 
7. 작가님의 작가 노트를 보면서,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대립 쌍을 염두해 두고 있다고 생각 했어요.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자연(동물), 인간 대 비인간 타자가 그것인데요. 여기에 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게 제가 작업을 진행하며 고려했던 순서대로 설명이 된 것 같아요. 가장 마지막에 언급된 대립 관계가 앞선 부분들을 다 포함한 논의가 될 텐데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런 부분들에 관해 고민하다 보니까 보다 넓은 영역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8.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어떻게 되시나요.
 
앞으로 할 작업의 주제보다는 방식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사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은 굉장히 개인적인 부분에서 출발해요. 그런데 저의 사소한 일상과 생각을 작업으로 가지고 갈 때, 내 일기보다는 다수가 받아들이기 쉬운 보다 넓은 영역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런 것보다 제가 작가를 시작하게 된 계기처럼, 좀 더 나의 개인적인 느낌이나 경험에 집중하면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같은 문제를 평소에 계속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저의 문제의식은 지극히 단순하고 사적인 영역에서 비롯되거든요. 여러 사회적 사건 혹은 현상들이 제 개인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고 어떤 부분에서 제가 피해를 보거나 불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이에 관해 고민하게 되고, 자연스레 다수가 느끼고 있는 어떠한 문제의식에 가까워지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부분이 어떠한 거대 담론에 포함될 수 있을 뿐이지 인류가 직면한 굵직한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이러한 경험들을 상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작업의 시작점이 되는 좀 더 개인적인 부분을 재밌게 풀어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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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wer_손지영(KNOT:)

손민효 @pshd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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