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울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기억을 걷는 시간》 전시에 설치된 < 안개의 그림자 >의 경우 한쪽에는 작가님 아버지의 인터뷰 영상이, 다른 한쪽에는 커튼이 설치되어 그 안에서 관객들이 VR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간을 가르는 커튼의 의미와 < 안개의 그림자 >를 3D VR영상으로 제작한 이유가 있을까요?
- VR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VR은 가상현실이죠. 작품 구성이 아버지의 인터뷰를 통해서 할아버지가 1951년에 어떻게 월북을 했는가를 초현실적인 3D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거거든요. 그래서 실제가 아니죠.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VR을 장착했을 때 관객들이 저의 이야기를 더 몰입해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장비를 쓴 거죠. 저의 이야기이지만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한 거죠. 그다음에 커튼을 사용한 이유는 가상과 현실을 분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공간에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VR 장비가 설치되어 있고 왼쪽에는 아버지 인터뷰가 다큐멘터리로 나온단 말이에요. 이게 현실이죠. 오른쪽에는 제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이고. 커튼으로 그 경계를 만든 거죠. 커튼 안에는 안개의 그림자의 중심적인 시구 “모든 경계는 가시거리 제로의 허상이고, 모든 한계선은 충돌선이자 오리무중의 안개였다.”가 적혀있죠.
6. 이 작업의 제목은 < 안개의 그림자 >인데요. 안개는 현실을 흐리게 보게 하고, 그림자는 실재의 음영이라 생각됩니다. 사건을 다루는 작가님의 방법론과 제목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느껴지는데 이에 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안개는 그림자가 거의 없죠. 구름은 그림자가 있지만, 안개는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잖아요. 이렇게 보면 제목이 아주 모순적이죠. 이 지점이 앞에서 말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정권들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자기 안위를 위해서, 남북한 분단 이데올로기를 가져다 쓰고 있잖아요. 분단 이데올로기로 장막 쳐진 정치적 상황이 마치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안개로 가려짐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건들, 예를 들어 제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할아버지의 월북 이야기와 같은, 오빠들에게 들었던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가정폭력 등 이러한 파장으로 파생된 것들이 그림자가 되는 거죠.
7. 과거의 어떤 것(사건, 경험)을 다루는 작업은 일종의 기념비적 성격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념비는 1차적으로 기억을 위한 장치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망각이나 상기를 위한 수단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세 가지 모두 조금의 의미의 격차가 있을 텐데요. 작가님이 과거의 자취를 남기고 공유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 기억 속에는 과거도 담겨 있지만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시점과 방향이 잠재적으로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공유해도 사람이 기억하는 건 다 다르죠. 그게 어떤 관점을 가지고 기억을 리뉴얼 하느냐에 따라서 발굴된 역사가 기술되는 게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억은 망각의 의미라기보다는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투쟁을 통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안개의 그림자 같은 것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또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미래를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가진 국가와 민족에 대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The Wretched of the Earth, 1961년)’에 서술한 내용이 떠오르는데요. “... 식민주의는 단순히 지배받는 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지배를 강요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식민주의는 단지 사람들을 억누르고 토착민의 두뇌를 모든 형태와 내용에서 비워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일종의 비열한 논리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왜곡하고, 변형시키고, 파괴한다."
8. 작가님의 또 다른 작업인 < 풍경의 좌표 >에서 식물을 스캐노그래피*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 네, 스캐노그래피는 스캐너 위에 식물을 스캔한 겁니다. 제가 2009년도부터 이 방식을 이용해서 작업을 해 왔죠. 여기서 풍경의 좌표는 사람도 주민등록증이 있는 것처럼 땅도 자기만의 위·경도가 있잖아요. 그걸 찍어가면서 제가 지도를 그리고 그 장소에 있는 풀을 스캐닝한 거죠. 그래서 풍경의 좌표는 할아버지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서부터 시작되는 월북 경로를 추측해서 그 경로에 있는 풀을 스캔한 거죠. 인간의 발길이 지나간 땅에는 73년의 세월 동안 전쟁과 반목의 흔적이 남아 있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헛헛한 풍경 속의 식물들은 스스로 역사가 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9. 작가님의 이 두 작업은, 작가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작가님 자신에 대한 아카이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미시적인 아카이브가 현대미술에서 가지는 의미가 궁금합니다.
- 아카이브 아트가 가지는 어떤 의미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카이브도 어떠한 방향과 관점에서 정렬하고 수집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죠. 이것들이 개인의 미시 서사에서 나오는 거지만 모이면 엄청난 증거물이 되는 거잖아요. 이러한 아카이브는 어떻게 한 가족이 역사적인 사건, 즉 국가 폭력에 의해서 세대를 이어 검열과 통제를 당하고, 그것들이 모여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그 여파로 인해서 자손들이 고통을 받아 왔는지, 증언하는 어떤 단서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아카이브를 통해서 수집된 개별 기록들이 모여 보편성으로 확장된 아카이브를 또 구축할 수 있는 거죠.